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3:28:54

고프 휘틀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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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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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제21대 총리
에드워드 고프 휘틀럼
Edward Gough Whitlam
파일:Gough-Whitlam-at-the-Lodge.jpg
<colbgcolor=#132331> 본명 Edward Gough Whitlam
에드워드 고프 휘틀럼
출생 1916년 7월 11일
호주 빅토리아 주 큐(Kew)
사망 2014년 10월 21일 (향년 98세)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엘리자베스 베이
국적
[[호주|]][[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21대 총리
1972년 12월 5일 ~ 1975년 11월 11일
학력 시드니 대학교 ( 법학 / 학사)
신체 키 194cm
배우자 배우자: 마거릿 휘틀럼[1] (1942년 결혼)
자녀 슬하 3남 1녀
정당
약력 노동당 부대표[2]
노동당 원내대표[3]
호주 외교부 장관[4]
호주 제21대 총리
서명
파일:고프 휘틀럼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총리로서2.2. 총독의 총리 해임2.3. 총리 해임 이후

[clearfix]

1. 개요

호주의 정치인이자 21대 호주 총리이다. 역대 호주 총리 중 가장 오래 산(98세) 인물이며[5] 독립 이후 호주 사상 처음으로 총독으로 인해 해임된 총리이다.

2. 생애

시드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공군 항법사로 참전했고 전후 학업을 마친 후 변호사 자격증을 따 법조인으로 활동했다. 1952년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0년에 당 부대표에, 1967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1969년 총선에서는 패배했으나 1972년 총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호주 21대 총리에 오른다.

2.1. 총리로서

노동당 당수로서 1972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21대 호주 수상으로 취임했다. 수상 재임기에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미군이 북베트남의 하노이를 공습한 크리스마스 폭격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직접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여러모로 진보적 정책을 많이 추진하여 중국, 북베트남을 승인하는가 하면, 1974년에는 북한과 수교하기도 하였다.[6]

한편 취임 후 징병제를 폐지하고 의료보험제도, 대학 교육 제도, 법률 제도 등을 손보려고 했으나 상원을 장악한 자유당이 계속 법안 통과를 반대했고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휘틀럼 내각의 지지율을 계속 깎아내리는 요인이 되었다.

2.2. 총독의 총리 해임

1975년 말, 자유당 상원의원들은 정부의 세출예산 법안 표결을 거부하고 이를 하원으로 돌려보냈다. 휘틀럼은 이에 반발했고 여야간 대립이 극심해지던 중, 11월 11일 존 커(John Kerr) 총독이 그를 해임하고 맬컴 프레이저 자유당 대표(야당 대표)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사태는 끝났다.

표면적으로 커 총독이 총리를 해임한 이유는 상원에서의 예산 논의를 휘틀럼 총리가 방해(obstruct)했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정치적 악수(惡手)였다. 명분이 없는 무리한 해임에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총독 역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조기 퇴진해야 했으며, 이후 호주를 떠나서 대부분의 여생을 영국 등 유럽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호주에서 군주제 폐지 여론이 대두되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호주에서 왕실의 지지가 낮은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7] 다만 이는 왕실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게, 국왕은 호주에서 지명한 총독 후보자를 형식적으로 임명할 뿐이며, 국왕이 호주 내정에 간섭하는 일도 없다. 다만 호주 하원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총독의 월권을 제지해달라고 청원하였지만 여왕은 호주 헌법에 의한 총독의 권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 결과적으로 호주의 운명이 영국 여왕[8]과 그의 대리인인 총독에 의해 좌우된 모양새가 되었으니, 호주의 입장에서 이러한 애매한 군주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회의론이 부상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기보다는[9],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통치구조 자체가 논란이 된 것이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과 비교되기도 했다. 참고 기사. 노 대통령의 경우도 실질적으로 여당을 열린우리당이라는 소수정당으로 분리해서 나간데 대한 전 여당의 앙심과 야당의 밀어붙이기가 맞물려 박근혜 탄핵 때와 같은 범국민적인 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명분이 약한 탄핵소추를 하게 되어 결국 대중의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어쨌든 휘틀리 총리 해임 사건은 실질적으로 호주 국민 다수결의 의지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할 총리 해임권을 호주 국민이나 심지어 의회의 요구도 없이 명목상 국왕의 대리인인 총독이 멋대로 해임해버린 사건이므로, 국민적인 요구가 없었음에도 멋대로 대통령 탄핵안을 의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처리해서 통과시켜버린 해당 사건과 유사성이 비교되었다.

한편, 이 해임 스캔들의 흑막은 사실 미국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휘틀럼 내각은 베트남전쟁을 반대해서 호주 파병군 철수와 호주 미군기지 폐쇄를 거론하는 등 당시 미국 정부와 자주 마찰을 빚었고 이 때문에 미국이 당시 CIA를 통해 존 커 총독이 휘틀럼을 해임시키도록 사주했다는 것이 해당 주장의 요지다.

정부 기밀을 다루는 업무를 보던 방위사업체 직원 크리스토퍼 보이스는 우연히 잘못 발송된 CIA의 통신을 듣게 되었는데 그 통신에는 CIA가 휘틀럼 정권을 실각시키려고 모의하는 내용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CIA측에서 존 커 총독을 '우리 편'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었으며 미국 정부는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주장했다. 또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자 조너선 크위트니는 존 커 총독이 CIA로부터 해외여행 비용 등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영어판 위키에서는, 노던 준주에 위치한 파인 갭 운영을 골자로 한 영국과 미국의 정보협정인 UKUSA의 존재여부를 현직 호주 총리도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 알게 된 고프 휘틀럼이 대노하여 의회에 호주 내 CIA 작전에 대해 폭로하려고 하자 발표 당일 백악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호주 총독의 총리 해임권을 발동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미국과 영국이 어떻게 엄연히 외국인 호주에 호주 총리도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군사기지를 설치할수 있었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 당시(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호주는 100% 완벽한 독립국은 아니라서 영국이 호주의 외교에 어느정도는 개입을 할 수 있었다. 호주가 아주 완전하게 독립국이 된 것은 이른바 오스트레일리아 법(Australia Act)이 호주와 영국 양국에서 통과된 1986년이다.
?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난 현재는 진실은 저 너머에쯤 되는 일화.[10] 50년도 안 됐는데요?

2.3. 총리 해임 이후

휘틀럼 총리가 해임된 이후 노동당은 같은 해 12월 13일 총선에서 대패했다. 휘틀럼은 당 대표직은 계속 유지했으나 노동당이 1977년 총선에서 다시 패배하자 당 대표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잡자 밥 호크 총리는 그를 유네스코 대사로 임명했고, 후에 공로를 인정 받아 유네스코 집행이사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 혼전 성씨 도비(dovey), 1919년 11월 19일 ~ 2012년 3월 17일 [2] 1960년 3월 7일 ~ 1967년 2월 9일 [3] 1967년 2월 9일 ~ 1977년 12월 22일 [4] 1972년 12월 5일 ~ 1973년 11월 6일 [5] 만약 이 기록이 깨지려면 현재 생존중인 전현직 총리들 중 최고령인 존 하워드가 2037년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6]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격렬히 반발했고 원래대로 하자면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호주와 단교해야 했지만 중요한 1세계 우방인 호주와 단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결국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는 6.23 선언을 선포하고 적극적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돌입하게 된다. 정작 이 사단을 만든 호주-북한 외교관계는 북한의 깽판으로 1년 만에 단교당한다. [7] 1999년 호주의 공화정 투표가 진행된 적이 있는데 55%대 45%로 간신히 왕정 유지가 이기는, 영국 왕실로서는 절체 절명의 위기가 온 적도 있었다. 그나마도 왕정 폐지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의원 내각제, 대통령제 등을 놓고 공화제의 표가 분산돼서 가까스로 유지된 것이었다. 그나마 헌정위기의 충격이 가신 후에는 왕정 지지율이 다시 어느 정도 올랐다. [8] 엄밀히 말하면 영국 국왕이 호주 국왕을 겸하는 것이지, 호주가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당시 국왕 엘리자베스 2세는 일반적으로 영국 여왕이라고 여겨졌고, 호주의 왕위는 거기에 부수되는 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사실이다. 평상시에 군주는 국가의 정체성 및 영연방과의 유대를 상징하는 정도에 불과하니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러한 국가 비상상황을 유발하고 이를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이 호주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는 점은 문제가 될 수 있다. [9] 이 사태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개입했는지에 대하여 의혹이 있었으나, 2020년 호주 정부 문서가 공개되면서 여왕의 지시는 없었음이 밝혀졌다. # 엘리자베스 2세의 입장에서는 이 사태에서 총독과 총리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도 결과적으로 호주 내정에 개입하는 모양새가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10] 이런 식의 논리로는 내가 죽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나라는 존재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게 참인걸까? 그저 증명하는데 시간과 자료를 더 많이 구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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