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상세
중국의 손을 빌려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일본은 아예 간도의 조선인들을 초토화시켜 버리기로 하고 8~9월에 계획을 수립해 25,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간도에 투입하였다. 마침 훈춘 사건이 발생하자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삼은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자기네 앞마당인 것처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피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이런 학살에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2]이 사망했고 한인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여담으로 청산리 전투는 이 간도 참변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에 벌어졌다. 북로 군정서군은 위의 중국군과의 교섭에 따라 근거지를 이동하여서 청산리에 집결했고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들의 추적을 피한 독립군들은 밀산부 한흥동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했다.[3]
간도 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향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취재 도중 실종되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일제가 그를 암살하고 암매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82년작 한국 영화 <일송정 푸른 솔>에서도 언급되는데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으나 학살당하는 한인들을 작두로 목을 친다든지 마을을 불태운다.
영화 암살에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설정상 현직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가 간도 참변 당시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17사단의 지휘관이었기 때문. 주인공인 안옥윤이 회상 장면에서 간도참변 때 자신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언급하는데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차라리 권총으로 살해하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4]
간도에서 학살이 발생하기 전에 연해주에서도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해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