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16:37:55

가와고에 성 전투

가와고에성 전투에서 넘어옴
河越城の戰い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역사적 사실인가?

1. 개요

1546년 5월 19일 일본 센고쿠 시대 무사시국 가와고에 성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

무로마치 시대 동안 간토 지방을 지배해온 구세력들이 신흥세력 후호조씨에 대항해 연합했으나, 이 전투 승리로 후호조씨가 간토의 패자로 올라서게 된다.

일본 3대 기습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 이 전투 이후 호조 가문이 간토 지역의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2. 배경

당시 간토 지역은 쇼군을 배출하는 아시카가 가문의 일족 고가쿠보와 간토 간레이 직을 맡고 있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이 서로 간토 패권을 둘러싸고 대립중이었다. 이때 오다와라 한 구석에서 세력을 키운 호조 소운은 오기가야쓰파의 오모리, 미우라 등 여러 가문들을 멸망시키고 이즈를 차지하고 아들 호조 우지쓰나 때는 무사시로 진출해 에도 성, 가와고에 성을 함락시키면서 오기가야쓰파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고가쿠보와 우에스기 가문들은 관동관령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소운, 우지쓰나 2대에 걸쳐 호조 가문이 엄청나게 성장하며 관동 최대의 세력으로 급부상하자 경계심을 갖고 싸우게 됐으나 번번히 패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조 우지쓰나가 사망하여 가독이 승계되는 일이 벌어지자, 그 동안 호조 가문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왔던 고가쿠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과 동맹을 맺고 호조 가문을 침공하게 된다.

3. 전개

1545년 10월 31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 고가쿠보의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7만 연합군이 가와고에 성을 포위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호조 가문은 호조 우지야스가 당주가 된지 얼마 안 됐고, 서쪽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다케다 신겐과 동맹을 맺고 우지쓰나 시절부터 줄곧 호조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조 쓰나시게가 이끄는 약 3천 명의 병력만이 가와고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호조 우지야스는 다케다, 이마가와 가문과 교섭을 하여 서쪽의 위협을 잠재우고 8천 명의 원군을 직접 이끌고 가와고에 성을 구원하러 나선다.

우지야스가 도착한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는데 우지야스는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적들을 기습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이후 쓰나시게의 동생 구시마 가쓰히로를 가와고에 성으로 잠입시켜 쓰나시게에게 작전 계획을 알려주고 연합군에게 거짓 항복을 제의하고 연합군 측이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하자 군사를 뒤로 물리면서 연합군을 방심하게 한다. 방심한 연합군은 군기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1546년 5월 19일 밤, 호조 우지야스는 군대를 4개 부대로 나누어 예비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로 연합군 진지를 기습공격했다. 진지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사하면서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때 호조 쓰나시게가 거느린 3천의 가와고에 성 수비군까지 가세하면서 연합군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고 결국 1만 3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4. 결과

이 전투로 인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멸망하고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이후 영지에서 쫓겨나 나가오 카게토라에게 의지하게 되며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은 몰락했고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호조 우지야스의 누이에게서 낳은 아들 요시우지에게 직위를 양보하면서 고가쿠보 역시 급속도로 쇠퇴한다. 반면 호조 우지야스는 이 전투의 승리로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간토 간레이 직위를 얻어 다케다, 우에스기와 함께 간토 지역의 패자로 성장하고, 이후 간토의 대부분 지역을 석권하기 시작한다. 또한 우지야스는 이 전투 이후로 사가미의 사자라는 이명을 얻게된다.

5. 역사적 사실인가?

다만 이 문서의 내용는 이전의 정설로, 현재는 새로운 사료들의 발견 등을 통해 '가와고에 성 전투'라고 특정할 수 있는 전투는 없었고, 수일간 가와고에 성 인근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을 합쳐서 전승된 것이라는 설이 정설화 되었다. 이에 따르면 가와고에 성 인근에서 호조가가 수적 열세였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었고,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병으로 급사하면서 연합이 와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호조가의 기록에도 야마우치 우에스기를 상대로 3000여명을 전사시키는 활약은 적혀 있지만 7만명 규모의 대규모 공성전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구자들 중에는 아예 대규모 백병전이 없었고 대규모 포위전과 게릴라전이 주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아시카가 하루우지가 정말 가와고에 성 전투에 참전한 것이 맞느냐는 주장도 떠오르고 있다. 왜냐하면 전투 이후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호죠 우지야스를 간토 간레이로 임명해 그의 패권을 인정했고, 여기에 호죠 가문의 압력이 들어갔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데다가 오히려 호죠 가문에서는 아시카가와 싸우길 기피하며 딸을 시집보내는 등 그를 상당히 존중해 주었다. 애당초 호죠 가문에서는 아시카가에게 중립을 요구했었는데, 전투 과정에서 아시카가가 보인 행보를 보면 전투 도중 제1차 고쿠후다이 전투 이후 호죠 가문이 편입한 삼촌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옛 본거지로 향하는 등 호죠 가문과 싸운다기보단 호죠 가문이 무단으로 차지한 고가쿠보의 본거지를 되찾는다는 의도가 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